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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10세 구스타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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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칼 10세 구스타브는 1622년 뉘셰핑에서 태어나 1660년 사망한 스웨덴의 국왕이다. 그는 30년 전쟁에 참전하고 크리스티나 여왕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며, 1654년 즉위 후 국내 분열을 치유하고 정복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제2차 북방 전쟁을 일으켜 폴란드와 덴마크를 공격했으며, 대벨트 해협을 건너는 등 군사적 업적을 남겼다. 1660년 사망으로 북방 전쟁이 종결되었으며, 그의 아들 칼 1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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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10세 구스타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세바스티앵 부르동의 칼 10세 구스타브 초상화
세바스티앵 부르동의 초상화
이름칼 10세 구스타브
스웨덴어 이름Karl X Gustav
출생일1622년 11월 8일
출생 장소뉘셰핑 성, 스웨덴
사망일1660년 2월 13일
사망 장소예테보리, 스웨덴
매장일1660년 11월 4일
매장 장소리다르홀멘 교회
서명
통치
왕위 계승스웨덴 국왕
브레멘 및 페르덴 공작
통치 기간1654년 6월 6일 – 1660년 2월 13일
이전 통치자크리스티나
다음 통치자칼 11세
결혼과 자녀
배우자헤드비그 엘레오노라 (1654년 결혼)
자녀칼 11세
구스타프 칼손, 뵈링에 및 린드홀름 백작 (사생아)
왕가
가문팔츠-츠바이브뤼켄 가문
아버지요한 카시미르, 팔츠-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백작
어머니카타리나 아브 스베리예
종교
종교루터교

2. 어린 시절

뉘셰핑에서 독일 귀족이자 팔츠츠바이브뤼켄의 후작인 요한 카지미르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이복 누이 카타리나 아브 스베리예 왕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사촌인 크리스티나 여왕과 함께 스웨덴 궁정에서 성장하며 훌륭한 시민 교육을 받았다. 이후 칼 10세는 레나르트 토르스텐손 밑에서 전쟁 기술을 배웠으며, 브라이텐펠트 전투와 얀코프 전투 (1645)에 참전했다.[9] 1646년부터 1648년까지 스웨덴 궁정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당시 섭정 여왕인 사촌 크리스티나의 잠재적인 남편 후보로 여겨졌다.[9] 그러나 크리스티나가 결혼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이러한 기대는 무산되었고, 악셀 옥센셰르나가 이끄는 스웨덴 섭정회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49년에 크리스티나는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9] 1648년에는 독일 주둔 스웨덴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9]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로 인해 군사적 명성을 얻는 것은 불가능해졌지만,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실무 회의에서 스웨덴 전권대사로 활동하면서 외교를 배울 기회를 얻었고, 빠르게 습득했다고 전해진다.[9]

3. 왕위 후계자

칼 10세 구스타브는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에게서 전술을 배웠고, 제2차 브라이텐펠트 전투와 얀카우 전투에 참전했다.[9] 1646년부터 1648년까지 스웨덴 왕궁을 방문하여 사촌 크리스티나 여왕의 남편 후보로 여겨졌으나, 크리스티나가 결혼을 완강히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크리스티나는 악셀 옥센셰르나가 이끄는 스웨덴 섭정회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49년 칼 구스타브를 후계자로 지명했다.[9]

1648년, 칼 10세는 독일 주둔 스웨덴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9] 같은 해 10월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어 군사적 명성을 얻을 기회는 사라졌지만, 뉘른베르크 실무 회의에서 스웨덴 전권대사로 활동하며 외교를 배울 기회를 얻었다.[9]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은 후, 여왕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스웨덴으로 돌아온 칼 10세의 입장은 위태로워졌다. 그는 1654년 6월 5일 크리스티나의 퇴위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욀란드섬으로 물러나 있었다.[9]

4. 즉위와 국내 정책

칼 10세 구스타브는 사촌 크리스티나 여왕의 퇴위 다음 날인 1654년 6월 7일에 대관식을 치렀다.[9] 그의 통치는 국내 분열을 치유하고 정복을 위한 새로운 정책을 위해 모든 국가의 역량을 결집하는 데 집중되었다. 덴마크를 상대로 미래의 동맹을 확보하기 위해 1654년 10월 24일 홀슈타인고트로프의 헤트비히 엘레오노라와 정치적 결혼을 맺었다.[9] 그녀는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3세의 딸이었다.

칼 10세 구스타브 국왕과 헤드비히 엘레오노라 여왕 훈장


1655년 3월 스톡홀름에서 소집된 릭스다그는 전쟁과 몰수된 왕실 토지의 반환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국가적 문제를 처리했다. 칼 10세는 폴란드와의 전쟁이 필요하며 매우 유리할 수 있다고 대표자들을 설득했지만, 군사적 목적을 위한 보조금 문제는 다음 릭스다그로 연기되었다.[9] 1659년 그는 스웨덴 외란드의 오텐비에 있는 왕실 사냥 보호구역에서 사냥하는 모든 사람에게 엄벌을 선포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섬의 남쪽 끝을 분리하는 긴 건식 석조 벽을 건설했다.

새 국왕에게는 크리스티나 여왕이 남긴 재정 문제를 비롯한 난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칼 10세 구스타브는 재정에 관해 크리스티나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지만, 크리스티나가 정한 영원한 규정을 존중했기 때문에 재정 문제는 미뤄졌다. 그럼에도 칼 10세 구스타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656년에 스웨덴 최초의 은행 (스톡홀름 은행, 훗날 릭스방크)을 창설했다.

대외 문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러시아, 덴마크의 위협으로 집약되어 있었다. 팔츠 가문의 왕위와 관련해서는 스웨덴 왕가와 동족으로 스웨덴 왕위의 정당한 계승권을 가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측에서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고, 언젠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스웨덴에 대한 군사 행동으로 나설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서는 흐멜니츠키의 봉기를 발단으로 대규모 전란 시대인 "대홍수 시대"에 돌입했다. 이는 스웨덴에게 폴란드와의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할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5. 제2차 북방 전쟁 (1655년 ~ 1660년)

1655년 칼 10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 즉 제2차 북방 전쟁을 시작했다. 스웨덴군은 바르샤바크라쿠프를 점령하는 등 초반에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폴란드 내에서 전국적인 저항이 일어나면서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칼 10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와 동맹을 맺어 폴란드군을 격파하고 바르샤바를 재점령했지만, 폴란드의 끈질긴 저항과 브란덴부르크의 배신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바르샤바 근처에서 타타르족과 교전하는 칼 10세 (칼 10세는 산병 옷차림을 하고 있다.)


1657년, 덴마크-노르웨이가 스웨덴에 선전포고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 칼 10세는 덴마크가 남쪽에서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빠르게 윌란반도를 점령하고 브레멘 공국을 회복했다. 그러나 프레데리시아 요새와 덴마크 함대의 저항, 그리고 덴마크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동맹, 브란덴부르크의 배신으로 스웨덴은 위기에 처했다.

스토레벨트 해협을 건너는 칼 10세 구스타브


1658년 겨울, 혹한으로 릴레벨트 해협스토레벨트 해협이 얼어붙자 칼 10세는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덴마크의 셸란섬을 기습 공격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이 빙상 침공은 덴마크에 큰 충격을 주었고, 결국 덴마크는 로스킬레 조약을 통해 스웨덴에 영토의 상당 부분을 할양해야 했다.

하지만 칼 10세는 덴마크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 재차 침공을 감행했고, 코펜하겐을 포위했다. 그러나 코펜하겐 시민들의 저항과 네덜란드 공화국 함대의 지원으로 스웨덴군은 패배했다. 1659년 네덜란드는 덴마크 제도들을 해방시켰다. 발트해 무역은 네덜란드 경제에 중요했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외레순 해협을 통치하는 데 그와 같은 강력한 국가를 허용하지 않을 것을 칼 10세에게 분명히 했다.

5. 1.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

1655년 7월 10일, 칼 10세는 제2차 북방 전쟁으로 불리게 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스웨덴을 떠났다. 전쟁이 선포될 당시 그는 5만 명의 병력과 50척의 군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1655년 7월 1일 스웨덴 군대가 폴란드령 리보니아에서 뒤나부르크를 점령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고, 7월 25일 폴란드 군대는 포즈난칼리시를 스웨덴 국왕의 보호 아래 두었다. 그 후 스웨덴군은 저항 없이 바르샤바로 들어가 비엘코폴스카 전체를 점령했다. 폴란드 국왕 폴란드의 요한 2세 카지미에시는 슐레지엔으로 도망쳤다.

그 후, 칼 10세는 크라쿠프로 진격하여 두 달간의 포위 끝에 스웨덴군이 점령했다. 크라쿠프의 함락은 폴란드인들의 마지막 희망을 꺾었지만, 연말 전에 폴란드 내에서 반발이 시작되었다. 10월 18일 스웨덴군은 쳉스토호바의 요새 수도원을 포위했지만, 폴란드인들은 영웅적으로 방어했고 70일 간의 포위 후에 스웨덴군은 큰 손실을 입고 퇴각해야 했다. 이 성공은 전쟁에 국가적, 종교적 성격을 부여하며 대중적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칼 10세의 무감각, 그의 장군들의 탐욕, 용병들의 야만성, 폴란드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자신의 지위를 합법화하려는 시도, 그리고 그가 분할을 협상한 것은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국민 정신을 일깨웠다.[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한 칼 10세 구스타브의 승리''(c. 1655), 바르샤바 국립 박물관


1656년 초, 요한 2세 카지미에시는 망명에서 돌아와 재편성된 폴란드 군대를 이끌었다. 이때까지 칼 10세는 폴란드를 정복하는 것보다 폴란드군을 격파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주요 목표인 프로이센 정복은 미완으로 남았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스웨덴 국왕의 야망에 놀라 새로운 적이 되었다. 칼 10세는 쾨니히스베르크 조약 (1656년 1월 17일)을 통해 선제후를 강제로 동맹이자 봉신으로 만들었지만, 폴란드의 전국적인 봉기는 그가 남부에 있어야 함을 절실히 요구했다. 몇 주 동안 그는 폴란드의 게릴라들을 추적하며 갈리치아야로스와프까지 남쪽으로 진격했지만, 뚜렷한 결과 없이 15,000명의 부하 중 3분의 2를 잃었다. 잘 관리된 강을 따라 사방으로 교차하는 습지 숲 지역에서 세 개의 군대 사이에 그의 군대가 갇힌 상황에서 야로스와프에서 바르샤바로의 퇴각은 그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 하나로 증명되었다. 6월 21일 폴란드군은 바르샤바를 탈환했고, 4일 후 칼 10세는 마리엔부르크 조약 (1656년 6월 23일)을 통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7월 28일 ~ 30일 18,000명의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 연합군은 3일간의 전투 후에 바르샤바에서 40,000명의 얀 2세 카지미에시의 군대를 물리치고 폴란드의 수도를 다시 점령했다. 하지만 이 무훈은 완전히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수상한 태도가 스웨덴 국왕에게 폴란드와 협상을 시작하도록 강요했을 때, 그들은 제안된 조건을 거부했고, 전쟁은 재개되었으며, 칼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와 공격 및 방어 동맹 (라비아우 조약, 1656년 11월 20일)을 체결하여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그의 후계자들이 동프로이센의 완전한 주권을 소유하도록 규정했다.[1]

5. 2. 덴마크-노르웨이와의 전쟁



칼 10세는 폴란드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657년 6월 1일 덴마크-노르웨이의 선전포고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그는 토르스텐손에게서 덴마크가 남쪽에서 공격받을 때 가장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빠른 속도로 덴마크를 공격했다. 1657년 6월 말, 8,000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포메라니아 남쪽의 비드고슈치(브롬베르크)에서 출발하여 7월 18일 홀슈타인 국경에 도착했다. 덴마크군은 흩어졌고, 스웨덴군은 브레멘 공작령을 되찾았다. 초가을, 칼 10세의 군대는 윌란반도를 장악하고 공작령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프레데리시아 요새는 8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칼 10세의 소규모 군대를 막았고, 덴마크-노르웨이 함대는 이틀간의 전투 끝에 스웨덴 함대가 덴마크 섬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제 스웨덴 국왕의 입지는 위태로워졌다. 7월, 덴마크-노르웨이와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공수 동맹을 맺었다. 설상가상으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스웨덴의 어려움을 알고 스웨덴에 대항하는 동맹에 가담하여, 칼 10세가 올리버 크롬웰쥘 마자랭 추기경 등의 중재를 받아들이도록 압박했다. 하지만 스웨덴이 분쟁을 평화 회의에 넘기는 것을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칼 10세는 10월 23~24일 프레데릭스오데를 점령하고, 수송선으로 자신의 군대를 퓐섬으로 옮길 준비를 했다. 그러나 곧 더 저렴한 방법이 나타났다. 1657년 12월 중순, 덴마크-노르웨이에게 큰 피해를 줄 혹한이 시작되었다. 몇 주 만에 추위가 심해져 릴레벨트 해협이 얼어붙었고, 이는 스웨덴 군대의 전략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칼 10세는 순식간에 유틀란트 반도로 진입했다. 반도 아래쪽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적이 아니었다. 칼 10세의 왕비는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 출신이었고, 공국은 스웨덴군의 진입을 묵인했기에 유틀란트 반도는 칼 10세에게 유린당했다. 하지만 칼 10세의 진군은 여기서 멈췄다. 반도를 제압해도 덴마크를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덴마크의 해군과 수도 코펜하겐은 릴레벨트(소해협), 스토레벨트(대해협)에 의해 막혀 있었다.

하지만 1658년 겨울, 덴마크에 혹한이 닥쳐 소해협과 대해협이 모두 얼어붙었다. 칼 10세는 주저 없이 침공을 명령했다. 이를 스웨덴에서는 빙상 침공이라 부르는데, 이는 덴마크를 놀라게 했다. 스웨덴 군대 대부분이 얼음 위를 건너 코펜하겐 배후에 접근했다. 덴마크는 항복 의사를 밝히며 굴복했고, 칼 10세는 북방 전쟁의 사실상 승자가 되었다. 1658년 덴마크의 로스킬레에서 로스킬레 조약이 체결되어 칼 10세는 스웨덴 역사상 최대 영토를 얻었다. 이때 스웨덴은 스웨덴의 역사상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1656년부터 교전 중이던 러시아와도 1658년 말 휴전이 성립되어, 위기 상황에서 벗어났다. 덴마크를 굴복시킨 칼 10세는 덴마크 합병을 생각했지만, 잉글랜드 공화국프랑스 왕국의 설득으로 포기했다.

칼 10세는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3세에게 "프레데리크! 이제 우리 스웨덴어로 함께 이야기하자"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이 선언과 빙상 침공은 지금도 스웨덴인의 자랑으로 전해진다. 프레데리크 3세는 3월 덴마크의 프레데릭스보르 성에 칼 10세를 초대하여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다. 양국 국왕의 친밀함은 양국의 평화를 약속하는 듯했다. 하지만 칼 10세는 덴마크에 대한 불신을 지우지 못했다.

조약으로 스웨덴과 덴마크는 휴전했고, 칼 10세는 일단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칼 10세는 내정에 집중할 수 없었다. 1658년 말, 칼 10세는 덴마크가 네덜란드 공화국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여, 북유럽 패권 완성을 위해 노르웨이를 포함한 덴마크 정복을 꾀하며 1659년 다시 덴마크를 침공했다.

하지만 덴마크는 이전과 달랐다. 프레데리크 3세는 철저히 항전했고, 코펜하겐 시민은 스웨덴군의 공격을 견뎌냈으며, 공성전은 길어졌다. 스웨덴의 새 영토 스쿠네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이 틈에 덴마크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 밀담을 나누어 반스웨덴 진영으로 끌어들이고, 네덜란드, 합스부르크 가문과도 동맹을 맺었다. 동맹군은 유틀란트 반도로 진격했고, 칼 10세는 곤경에 빠져 스쿠네로 철수했다.

전쟁은 예상 밖으로 흘러갔고, 칼 10세는 모든 스웨덴 군을 본국으로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 해군도 스웨덴 해군을 괴롭혔다. 그럼에도 칼 10세는 전쟁 종결을 생각하지 않고, 스쿠네에서 작전 재검토에 전념했지만, 갑자기 열병에 걸려 진중에서 사망했다. 38세였다.

6. 죽음

1660년 1월, 국왕은 질병의 기색을 보였으나, 2월 13일 밤 38세(만 3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4][5] 칼 10세는 자신의 열정을 극복하고 창조하는 데 자신이 도움을 준 제국을 개발하고 결성하는 데 충분히 오래 살기를 바랐으며, 만약 그랬다면 스웨덴은 오늘날까지 강대국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덴마크는 칼 10세에게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자신의 자연 국경을 빚지고 있다.

1660년 1월 4일, 신분 의회 소집 직후 칼 10세 구스타브는 감기 증세를 보였다. 그는 병을 무시하고 예테보리 근처의 스웨덴 군대를 반복적으로 시찰했으며, 곧 오한, 두통 및 호흡곤란으로 쓰러졌다. 1월 15일, 궁정 의사 요한 쾨스터가 도착하여 의료 과실로 칼 10세 구스타브의 폐렴괴혈병소화불량으로 오진했다. 쾨스터는 여러 번의 관장, 하제를 투여하고[4], 사혈 및 재채기 유발제를 사용하는 "치료"를 시작했다. 3주 후 열이 결국 내리고 기침이 나아졌지만, 폐렴은 지속되었고 2월 8일까지 패혈증으로 악화되었다.[5]

2월 12일, 칼 10세 구스타브는 유언장에 서명했다. 그의 아들 칼 11세는 아직 미성년자였고, 칼 10세 구스타브는 6명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로 구성된 섭정단을 임명했다. 칼 10세 구스타브는 다음 날 사망했다.[5]

스톡홀름 리다르홀멘 교회에 있는 칼 10세 구스타브 국왕의 정교한 관


2월 12일과 13일 밤, 그는 스웨덴에 평화를 가져다달라고 간청한 후 최고 원수 가브리엘 옥센셰르나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6]

7. 가족

칼 10세 구스타브는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드비히 엘레오노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칼 11세(1655년~1697년, 재위 1660년~1697년)를 낳았다.[7]

칼 10세 구스타브의 정부 마르타 알레르츠는 구스타프 칼슨(1647년~1708년)을 낳았으며, 구스타프 칼슨은 뵈린제와 스카니아의 린드홀멘 성 백작이 되었다.

칼 10세 구스타브가 헤드비히 엘레오노라와 결혼하기 전 낳은 자녀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그 중 몇몇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7] 남작부인 루드밀라 얀코브스카 폰 라잔(1615년~1655년)과의 사이에서 아들 카를(카롤루스 벤젤라우스) 얀코프스키 z 브라시미(1644년~1684년)를 두었으며, 그는 모라비아의 레시체 성의 남작이 되었다.[8] 발보르 스타판스도터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닐스 칼손(그의 아버지와 매우 닮았음)을, 시도니아 요한스도터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사무엘 칼손을, 그리고 신원 미상의 여성과의 사이에서는 딸 안나 칼스도터를 낳았다.

1680년, 그의 왕비와 함께 있는 칼 10세 구스타브의 사후 메달

8. 계보

요한 카시미르할아버지:
요한 1세증조할아버지:
볼프강증조할머니:
안나[1]할머니:
마그달레네증조할아버지:
빌헬름 5세[2]증조할머니:
마리아[3]어머니:
카타리나할아버지:
칼 9세[4]증조할아버지:
구스타브 1세증조할머니:
마르가레타할머니:
안나 마리아증조할아버지:
루트비히 6세증조할머니:
엘리자베트[1]

참조

[1] 서적 Carl X Gustaf "den förste pfalzaren" Askerbergs, Stockholm 1910
[2] 간행물 In the Shadows of Poland and Russia: The Grand Duchy of Lithuania and Sweden in the European Crisis of the mid-17th Century. https://www.jstor.or[...] JSTOR 2006
[3] 문서 Karl https://runeberg.org[...] Nordisk familjebok
[4] 문서 2006
[5] 문서 2006
[6] 서적 Karl X Gustavs krig: Fälttågen i Polen, Tyskland, Baltikum, Danmark och Sverige 1655-1660 Historiska Media 2015
[7] 서적 Kungliga släktband
[8] 서적 Tajemství Jankovských z Vlašimi a na Bítově
[9] 웹사이트 Charles X. (King of Sweden)
[10] 웹사이트 Charles XI. (King of Sw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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